AI가 코드를 짜주는 시대다. 프롬프트 몇 줄이면 화면이 만들어지고, 함수가 채워지고, 버그까지 고쳐준다. 그래서인지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이제 개발은 결국 AI한테 시키는 일 아니에요?"
1인 개발자로 회사를 꾸려오면서 느낀 건 정반대다. 개발이 빨라질수록, 도구가 똑똑해질수록, 진짜 중요한 건 코드를 쓰기 전 단계에 있었다. 그리고 그 단계는 늘 아날로그였다.

화면보다 먼저, 종이가 있었다
새로운 기능을 구상할 때 나는 항상 종이와 펜부터 찾는다. 노트북을 펴고 에디터를 켜는 건 그다음 일이다. 사용자가 어떤 흐름으로 이 화면에 들어오고, 어떤 정보를 보고, 무엇을 누르고, 다음에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손으로 그려본다.
이상하게도 화면에 박스를 그리는 것과 종이에 박스를 그리는 건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든다. 화면에서는 자꾸 "이 컴포넌트를 어떻게 구현하지"로 생각이 새는데, 종이 위에서는 순수하게 "사용자가 무엇을 원하는가"에만 머물 수 있다. 도구가 비어 있어야 생각이 채워진다.
처음 회사를 시작했을 때는 이 과정을 종종 건너뛰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곧장 에디터를 열고 컴포넌트부터 만들었다. 결과는 늘 비슷했다. 절반쯤 만들고 나서야 "이게 사용자가 정말 원하는 흐름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때부터는 이미 쌓아둔 코드를 갈아엎느라 시간을 두 배로 썼다. 종이 한 장이면 끝났을 고민을, 코드 수백 줄을 쓰고 나서야 마주한 셈이다.
아날로그는 느림이 아니라 정확함이다
아날로그적으로 출발한다는 게 비효율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종이 위에서 흐름이 어색하다는 건 발견하는 데는 몇 분이면 충분하다. 같은 문제를 코드로 다 만들고 나서 발견하면 며칠이 든다. 손으로 먼저 그려보는 일은, 결국 가장 비싼 자원인 시간을 아끼는 일이다.
이건 AI를 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AI에게 무엇을 만들어달라고 시키기 전에, 내가 먼저 무엇을 원하는지 종이 위에서 명확히 해두지 않으면 AI는 그저 빠르게 모호한 결과물을 만들어줄 뿐이다. 생각이 흐릿한 채로 도구만 빨라지면, 더 빨리 길을 잃을 뿐이다.
오히려 AI를 쓰면서 이 사실을 더 분명하게 깨달았다. 예전에는 막연한 아이디어를 코드로 옮기면서 조금씩 생각을 다듬을 여유가 있었다. 직접 한 줄씩 쳐야 했으니까. 그런데 AI에게 맡기면 그 여유가 사라진다. 모호한 지시는 모호한 결과물로 그대로, 그것도 순식간에 돌아온다. 그래서 요즘 나는 AI에게 무언가를 시키기 전, 종이 위에서 더 오래 머문다. 화면 흐름, 예외 상황, 사용자가 망설일 만한 지점까지 손으로 정리해둔 다음에야 키보드를 잡는다. 도구가 빨라질수록 생각을 정리하는 단계는 오히려 더 중요해졌다.

손으로 그릴 때만 보이는 것들
종이 위에서 그림을 그리다 보면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던 질문들이 떠오른다. 이 버튼을 누른 사용자는 정말 다음 화면을 기대하고 있을까, 아니면 잠깐 멈춰서 확인하고 싶은 걸까. 이 정보는 한눈에 보여야 할까, 아니면 천천히 찾아보게 해야 할까. 이런 질문은 코드를 짜는 손에서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코드는 "어떻게 구현할까"를 묻게 만들지만, 종이는 "이게 정말 필요한가"를 묻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종이를 일종의 필터로 쓴다. 머릿속에 떠오른 기능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만들고 싶어서 만들려는 것인지를 가려내는 가장 빠른 방법이 종이 위에 그려보는 일이다. 그려봐서 설명이 안 되는 기능은, 대부분 만들어봐도 쓰이지 않는다.
결국 개발은 사람을 이해하는 일
코드는 결과물이지 시작점이 아니다. 시작점은 늘 사람이다. 이 기능을 쓸 사람이 무엇 때문에 답답해하는지, 어떤 순간에 이 화면을 열게 되는지, 무엇을 보면 안심하는지. 이런 것들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관찰과 상상에서 나온다. 그리고 관찰과 상상은 디지털 화면보다 종이 위에서, 키보드보다 펜을 쥔 손에서 더 또렷해진다.
거실 소파에 편하게 앉아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누르는 사용자를 떠올려본다. 그 사람은 내가 고민한 아키텍처나 코드의 우아함에는 관심이 없다. 버튼이 어디 있는지 헤매지 않고, 원하는 걸 빠르게 끝내고, 다시 편안히 소파에 기대고 싶을 뿐이다. 그 순간을 상상하는 일은 화면 설계도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상상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새로운 걸 만들 때마다 가장 먼저 종이를 편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이 첫 단계만큼은 바뀌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도구는 디지털로 점점 더 빨라지겠지만,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는 그 순간만큼은 여전히 아날로그다. 개발은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에서 출발한다.
